아침 일찍 아버지의 쑥스러운 배웅 속에서 노포동으로 출발했다. 9:25분 차, 남쪽으로 휴가를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들과 휴가를 맞아 서울로 놀러 가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 같았다. 버스는 막히지 않고 정확히 4시간 30분만에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에 지원이, 혜주에게 연락을 했지만, 한 명은 제주도에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태백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둘을 보는 게 주된 목적이었으니, 당혹감이 밀려왔다. 미리 연락을 하고 갈걸. 이 미루기 좋아하는 느긋한 성격은 어쩔 수 없다. (중요한 일 같은 경우,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서울에 도착했는데, 뭔가 긴장되고 민망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 것 같아.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렇게 지하철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서울 토박이가 몇이나 될까? 나와 같은 처지의 이방인들이 많다고 생각하니, 내가 부산에서 막 상경했다는 사실은 별로 개의치 않게 된다.

 오랜만에 보는 캠퍼스, 방학이라 캠퍼스가 한산했다. 경영관에 들어가 미리 점 찍어뒀던 하숙집, 자취집을 검색했다. 10만 원짜리 단칸방에 꽂혀 안암로터리에 있는 종암초등학교로 갔다. 동네 분위기는 꽤 내 맘에 든다.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긴 인문계 캠퍼스로부터 꽤 떨어진 곳이고, 대학가가 아닌 그냥 동네처럼 한적하고 고요하다. 그리고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는 제기동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하숙이 아니라 밥을 잘 챙겨먹을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지만, 이공계 학생식당이 가까이 있고, 또 가격은 예전처럼 싸고(참치채소덮밥1600!), 방학에도 하니 아침 일찍 부지런히 일어난다면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매달 23일 선불로 방값을 치르는 데, 이번 달은 사실 거의 쓰지 않는 거나 다름없으니, 주인집 할머니께 깎아주실 수는 없으신지 실랑이를 했다. 좀 치졸한 것 같지만, 나는 수입은 없고 지출은 많은 학생이기 때문에 아낄 수 있는 건 최대한 아껴야 한다. 결국 편도 버스비 3만원을 깎아 냈다. *^^*

 방은 처음 봤을 때 뜨악스러웠다. 서랍장도, 책장도, 책걸상도, 옷걸이도 없다. 다른 곳을 둘러본다고 하고 나갔다 다시 들어와보니, “, 아담하고 소박하군.”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란다에 버려져있다시피한 서랍장과 책장을 들여왔다. 이리 저리 살펴보니 서랍장은 꽤 쓸만하다. 책장도 수명이 다해가는 것처럼 보이나 아직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밖에 내다 둔 거라 흙먼지와 곰팡이가 끼어서 걸레로 닦아냈는데, 1시간이 걸렸다;; 서랍장안을 깨끗이 닦아내기 위해 머리를 들이 밀었을 때 풍겨온 곰팡이의 역한 냄새는 약간 과장해서 훈련소의 화생방에 못지 않았다. 방에도 은근 남아있는 흙먼지가 많아 깨끗이 닦고, 이렇게 블로그를 쓰고 있다.

 약간은 서글픈 생각이 든다. 이 단칸방은 솔직히 혼자 살기에도 너무 좁다. 가로 190, 세로 250 곱해서 4.75 평방미터. 2평이 채 안되네. 처음 살았던 기숙사는 천국이었고, 군복무전 일주와 같이 살았던 하숙방도 굉장한 호사였었다. (후배, 동기들을 많이 재울 때는 8명도 재운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취업전선에 뛰어든 복학생이고,

집안 사정은 뻔하고. 예전처럼 편하고 즐겁게만 학교생활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하고. 빨리 취직해서 비교적 좋은 집으로 이사 가겠어.

 여기에는 아직 많은 것을 갖춰놔야 한다. 지금 당장 다 마련할 수 없지만, 생각나는 데로 적어보자.

일체형 미니 빗자루와 쓰레받기, 헤어 드라이기, 거울, 집에 있는 옷걸이, 가을이부자리, 빨래 통, 세제, 휴지, 욕실용 슬리퍼. 우리 집에 남는 슬리퍼. 세면도구(치약, 비누, 샴푸), 우리 집에 많이 있는 수건. 굵은 표시된 거는 오늘이나 내일, 제기시장에서 마련하자. 그런데 이처럼 좁고 구석진 곳이 많은 데엔 사실 빗자루보다 작은 사이즈의 진공청소기가 훨씬 편하기도 하고 효과적인데드라이기 살 때 함께 알아봐야지 뭐.

 서울 도착해서 계속해서 드는 생각은, 예전이 정말 호시절이었다는 거. 하기 싫은 일도 많았고, 많이 피로했었고, 엉망인 생활이었지만, 항상 무언가 기대되는 일이 있었고, 즐거웠고, 학교에서 뛰어다녀야 할 이유가 있던 시절이었다. 지금 이 곳은 그저 회색 빛 배경 같다. 내가 취업전선에서 잘 해나 갈 수 있을지도 걱정되고, 대체 여기서 즐거운 일이 하나라도 생길까 싶고,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뭔지도 좀 궁금하다. 그저 막막한 기분. 거기에 취직을 하고 난 뒤에도, 내 인생은 형진이가 얘기했듯 뻔할 뻔 자일 것 같다. 물론 운명 같은 건 없다는 주의고, 내 하기 나름이라는 걸 알지만 지금은 그저 이런 기분이다. 지금 나의 삶의 목표야 취직으로 뚜렷하게 정해졌지만, 내가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유는 이곳에서 여러 가지 일들(성가대?)을 도모하면서 찾아 나서야 할 것 같다. 힘들고 지루하고 막막하지만 삶을 긍정할 수 있게 하는 그 무언가를 말이다.

 

*글 쓰는 일은 정말 재밌고 보람차다. 내가 쓰고 싶은 바람직한 에세이는 조지오웰이다
**지금 나의 삶을 긍정하게 만들 수 있는 건 역시 연애고 여자친구이겠지만, 아직 용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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